제목 신의 가면 - 서상환展 :: Painting
내용

『 신의 가면 - 서상환展 』

Seo Sanghwan Solo Exhibition :: Painting











▲ 서상환, 얼굴만다라









전시작가 서상환(Seo Sanghwan)
전시일정 2012. 04. 23 ~ 2012. 05. 07
관람시간 Open 10:00 ~ Close 18:00
∽ ∥ ∽
미광화랑(MIKWANG GALLERY)
부산시 수영구 민락동 701-3
T. 051-758-2247









● 신의 가면

김동화(金東華)


지난 2007년 10월 미광화랑에서 개최된 서상환 화백의 회고전에서는 우리 미술과 기독교적 풍토 등을 고려할 때, 그를 매우 특수하고 이례적인 경우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측면들을 발견했습니다. 당시 전시장에는 1960년대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의 전 시기에 걸친 유화, 수채화, 드로잉, 목판화, 목각화, 도각화(陶刻畵), 테라코타 등의 작업들이 망라되어 있었기에, 이 전람회는 그의 작업의 총체와 변천과정을 비교적 정밀하게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적 신앙으로 일평생 그리스도를 섬겨온 화가임에도, 표면적으로만 볼 때 그의 작업에는 무언가 비의(秘意)적인 느낌이라 할 만한 이교(異敎)적 분위기가 강렬했습니다. 이전의 평자(評者)들이 재삼(再三) 언급한 바처럼 화면은 밀교나 만다라적 도상들로 가득했고, 통상의 서양화된(westernized) 성화 속에서 표현된 전형적 성상들과 예수상을 과감하게 바꾸어 형상에 매이지 않은 본질상으로 이해하려는 독특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기에, 조금 낯설기도 했고 일면 당황스러운 점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화가의 표현 방식이 전혀 이해될 수 없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가 서양의 문화권을 통해 전파된 까닭에 그들의 풍토와 문화의 옷을 걸친 채 꾸며져 드러난 것일 뿐, 거기에는 그들에 의해 표현된 그것이 예수라는 존재의 전체상이나 본질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간과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가 처음부터 동양의 문화권을 통해 전파되었다면 어떠했을까 라고 가정해보면, 그리스도 이전의 그 지역 문화와 혼융된 도상적 특징을 띠는 성격의 미술이 싹트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느 것이 그리스도의 실체나 본질에 더 가깝냐 덜 가깝냐의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어찌되었든 그런 미적 형식과 내용을 가지게 되었을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의 형식과 내용이 기존 그리스도인들의 문화적 기표와 상충되는 측면이 있기에, 그가 전통적 기독교인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왔을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문화와 종교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수용해야 하느냐에 관한 깊은 성찰과 다양한 논의가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타문화를 새롭게 수용하는 과정에서 타문화가 기존 자문화와 어떻게 통섭, 종합되어야 하느냐의 질문에 대한 하나의 문제적 답변으로 화가의 작업이 지금 여기에 피투(被投)되어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기독교 작가들이 이처럼 직설적인 성상화(icon)를 시도한 전례가 없기에, 이러한 문제(한국적 성상화에 대한 비난이나 옹호)의 상당부분이 그의 작업과 중첩되어 제기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기독교 안에서는 비정통적이라 지적당하고, 기독교 밖에서는 단지 종교화(宗敎畵)로만 폄하되는 이 양비(兩非)의 시선에서 그의 작품은 이렇게도 혹은 저렇게도 읽혀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럼에도 그 와중에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면 이러한 그의 평생의 시도들이 종교와 미술에 대한 사계(斯界)의 논의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과 기독교 도상의 한국적 양식화의 한 전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이 분야의 선구적 작가로 지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서상환, 고상(몸부림)







▲ 서상환, Ethos







▲ 서상환, 부활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간절한 빎(懇求)’입니다. 이 간구는 예수를 통해 지상의 고통을 넘어 영원한 영광에 이르고자 하는 생의 비원(悲願)이며, 그것은 지극한 정성스러움(至誠)을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지극한 것은 반드시 통하게 되고 통하면 나와 하나님이 하나가 된다는 신앙적 기조가 언어의 세계를 넘어선 무의식적 성향의 자동기술적 영서(靈書)나 만다라(mandala) 등으로 표현되고 있는 점 역시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성령의 은사 혹은 신비 체험의 일종인 방언(glossolalia)이나 신어(神語) 작업의 경우, 이성적 자각의 방해를 받지 않고 의식의 통제 없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의식의 근원인 실체로서의 무의식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또한 최근의 작업들의 주조를 이루고 있는 만다라는 궁극적 깨달음을 원형(圓形)상으로 도해한 것으로, 이것을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ness)의 심연에 자리 잡고 있는 정신의 전체성인 자기(self)의 원형(原型)적 표현으로 보기도 합니다. 일찍이 융(Carl Gustav Jung)은 만다라를 그리는 사람의 무의식적 경향이나 소망이 만다라의 패턴과 상징, 문양 등을 통해 표현되며, 만다라를 그리는 행위가 내면의 무의식을 자유롭게 밖으로 흘러나오게 하는 치유적 효과를 발휘한다고 설파했습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되는 ‘신의 가면’ 연작 역시도 페르소나(persona,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은 나)와 그림자(shadow, 다른 사람에게 숨기고 싶은 나), 자아(ego, 의식의 주체인 나)에 대한 융의 언급과 연관시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그림자가 감추고 싶은 얼굴이라면 페르소나는 드러내고 싶은 가면이며, 이들 그림자와 페르소나는 자아의 양면이 되겠지요. 이것은 인간 존재의 이중성과 대극성(對極性)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소설 ‘데미안(Demian)’에 등장하는 아프락사스(Abraxas, 선과 악, 신과 악마 등의 양극성을 포괄하는 상징적 신성)나 음양이 공존하는 태극의 도상처럼 말입니다. 융의 개념에서의 그림자는 자아의 어둡고 동물적이고 사악한 부분으로, 이것을 기독교적 프레임으로 치환해 본다면 원죄(original sin) 혹은 죄성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으며, 페르소나는 혼인잔치 비유(마태복음 22장)에서의 예복에 해당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림자 즉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페르소나로서의 예복에 의해 그림자로서의 죄가 덮여 의롭다 하심을 얻고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의로움’이 아닌 ‘의롭다 일컬음’, 즉 이신득의(以信得義, justification by faith)의 교리에 대한 알레고리로서의 가면(융의 페르소나=기독교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의)과 얼굴(융의 그림자=기독교에서의 원죄) 개념을 상정해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물론 융의 그림자, 페르소나라는 개념이 기독교에서의 원죄, 예수 그리스도의 의라는 개념과 내용적으로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특히 융의 페르소나와 기독교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개념적으로 완전히 다릅니다. 다만 양자(兩者)를 구조적으로(내용적으로가 아니라) 그렇게 대응시켜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신의 가면’ 연작은 제의(祭儀)의 본질을 통찰하는 비밀스런 주제를 함의하고 있기도 합니다. 인간의 얼굴 위에 쓰인 신의 가면은 인간의 얼굴을 감추는 동시에 신의 얼굴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신만도 혹은 인간만도 아닌, 신과 인간의 합일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이자 동시에 신인 어떤 존재의 메타포인 것이지요. 고대 희랍에서는 제우스(신)와 테베의 왕녀 세멜레(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주신(酒神) 디오니소스를 제사하는 축제가 해마다 열렸습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에 의해 몸이 찢겨 죽임을 당하지만, 제우스의 어머니인 레아에 의해 다시 살아나 신이 됩니다. 이 디오니소스 축제의 첫째 날에는 제단에서 디오니소스 신의 가면을 쓴 제사장이 황소를 죽여 희생의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집전합니다. 이 제의에는 죽임 당함과 부활의 내용이 공존하고 가면은 이 과정을 매개하는 중요한 모티브가 됩니다. 이처럼 신과 인간의 갈등을 주술적으로 해결해 내려는 제의의 중심에 바로 가면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신)의 아들이며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 마리아(인간)를 통해 태어납니다. 또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지만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납니다. ㉮신의 본체가 육신을 입으시고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에 거하신 것은 ㉯얼굴과 가면의 공존이 상징(㉮,㉯의 두 내용이 서로 같다는 의미는 아님)하는 바인 신과 인간의 완전한 연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하나님(vere Deus)되심과 완전한 인간(vere homo)되심이 마치 ㉱신의 가면을 쓴 인간의 얼굴로 은유(㉰,㉱의 두 내용이 서로 같다는 의미는 아님)되고 있는 듯도 합니다. 신과 인간 사이의 갈등을 매개하는 이러한 가면 제의는 사회가 복잡해지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이 신과 인간 사이의 갈등보다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면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을 주로 다루는 연극이나 연희(演戱)로 차츰 진화하게 됩니다. 또한 제의 속의 시, 노래, 춤 등이 어우러진 원시가무가 오늘날의 다양한 예술장르인 문학, 음악, 무용 등으로 분화되는 것입니다. 결국 헬레니즘(Hellenism)과 헤브라이즘(Hebraism)을 아우르는 가면, 바로 이 가면이 중심에 놓인 제의를 모든 예술장르의 원류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 서상환, 산동네







▲ 서상환, 아가페







▲ 서상환, 침묵




기도의 종류들 중에 하나로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관상(觀想)이라는 단어는 ‘마음의 상을 바라봄’ 혹은 ‘신을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사랑하는 일’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을 오로지 일정한 대상에 기울이고 그 대상을 집중적으로 바라봄으로서 상념을 일으키는 관상 행위를 통해 그 대상과의 일치를 이루는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합일의 대상이란 물론 하나님이어야 하겠지요. 요한복음 14장과 17장의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가 지칭하고 있는 차원이며, 아버지와 아들과 내가 성령으로 하나 되는 깊은 영성의 자리를 뜻합니다. 그러나 말씀(로고스, λ?γο?)을 중심으로 하는 언어적 간구가 기독교적 전통에서 기도의 주류를 이루고 있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하나님과의 일치를 지향하는 관상기도는 신비주의나 동양의 명상 전통과 잘 구분되지 않는 탓으로 종종 기독교 내에서 이단시(異端視)되기도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종교혼합주의(religious syncretism)의 위험이 있을 수 있으며, 영분별이 안 되면 그릇됨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상존(常存)합니다. 은혜가 아닌 마음을 비우는 노력만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릇된 것이 되겠지요. 관상기도의 전통은 AD 1세기경부터 내려오고 있으며, 관상기도는 인간의 이성와 의지를 사용해서 드리는 기도가 아닌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비우는 기도입니다. 필자는 화가의 작품에 드러난 명상적 성격이나 밀교적 분위기로부터 기도의 방법론으로서의 관상의 영성이 그의 작업 속에 내재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불교식으로 말한다면, 정신의학에서의 무의식과 상통하는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 유심론에서 말하는 인간의 근본의식, 과거의 인식ㆍ행위ㆍ경험ㆍ학습 등에 의해 형성된 인상ㆍ잠재력을 종자(種子)라 하는데 이 종자를 저장하고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는 육근(六根)의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의식, 모든 선악을 포용하는 바다와 같은 함장식(含藏識))까지 천착하는 깊이라고나 할까요. 그의 예술이 추구하고자 하는 간절한 빎이 도달한 지점을 저는 그렇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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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8-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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