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붓질-흔적-내재성 - 신성호展 』
Shin Seongho Solo Exhibition :: Painting

▲ 신성호, Trace2105
98 x 98cm, Mineral Pigment on Canvas
전시작가 ▶ 신성호(Shin Seongho 辛成鎬)
전시일정 ▶ 2021. 09. 27 ~ 2021. 10. 03
초대일시 ▶ 2021. 09. 27 PM 5:00(마스크 쓰고 온도체크 후 입장)
관람시간 ▶ Open 10:30 ~ Close 18:00(점심 12:00 ~ 13:00)
∽ ∥ ∽
부산 미광화랑(MIKWANG GALLERY)
부산시 수영구 광남로 172번길 2(민락동)
T. 051-758-2247
www.mkart.net
● 재현을 부정하는 매혹
강선학(미술평론가)
이미지의 사유,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벌써 진부해졌다는 인상이다. 그만큼 이미지를 이해하는 어휘들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말이다. 영상 이미지를 비롯해 형상적 이미지랄 수 있는 시각예술에 대한 이해와 그를 표현하는 지칭어들이 급하게 변하고 있다는 상황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사유가 이미지를 따르지 못한다는 다른 말이 아닌가 싶다. 이미지를 창안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지칭하는 새말을 만들고 그것으로 다 된 듯한 제스처가 앞서 있다는 인상도 그런 것이다. 일상과 유리된 현대미술 담론의 현학성에 까닭이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 날부터인가 한국의 추상화는 단색조 회화가 석권하고 말았다. 현대미술의 다양성을 말하자면 추상과 개념이어야 할 것이고 그 다양성만큼 담론의 다양성이 보장된 장르도 없을성싶은데, 현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추상화는 설치와 영상에 밀려났을 뿐 아니라 단색화에서조차 밀려나 너무 단조로워졌다. 부산에서 제대로 추상화라고 일컬을 수 있는 특징을 보이는 작가는 몇몇 헤아리기도 힘들다. 작업을 볼 기회는 많지 않았지만, 추상화라는 장르가 가진 특성 안에서 여느 작가와 어떻게 다른 지점을 사유하고 있을까, 하는 질문이 신성호의 작업을 보아온 과정이다.

▲ 신성호, Trace2101
122 x 158cm, Mineral Pigment on Canvas

▲ 신성호, Trace2102
122 x 158cm, Mineral Pigment on Canvas

▲ 신성호, Trace2103
80 x 106cm, Mineral Pigment on Canvas
오랫동안 관심을 가졌던 그가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는 어떤 의미들이며 어떻게 보아야 할까. 어떤 말이 적절하고 적합할까. 이미지의 사유로서 사건이라면 공간, 시간, 질료, 사유, 가능함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미지가 불러세우는 사유의 다른 말이다. 들뢰즈의 용어를 빌리자면 ‘내재성의 구도’다. “내재성의 구도란 사유된 혹은 사유할만한 어떤 개념이 아니라 사유의 이미지, 즉 생각하다, 생각을 사용하다, 생각 속에서 나아가다... 등이 의미하는 바에 관하여 사유가 스스로 품게 되는 그러한 이미지”1)를 말한다. 직접적으로 시각 이미지와 화면의 자율성을 좀 더 폭넓게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니면 “예술작품은 하나의 감각 존재이며, 다른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존재한다”2)로 이해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1)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이정임. 윤정임 옮김, 『철학이란 무엇인가』 현대미학사, 2016. p.58
2)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이정임. 윤정임 옮김, 『철학이란 무엇인가』 현대미학사, 2016. p.234
그의 작업을 두고 추상화라는 말을 쓰지 않고 이야기하면, 회색, 청색, 갈색조의 톤이 주는 정조와 거친 선과 긋기의 흔적들이 들추어내는 색, 선의 충돌, 지우기와 드러내기, 흔적과 지우기가 중첩되는 행위와 시간이 만나는 현재성의 존재감, 이렇게 대신할 수 있다. 구체적인 대상이 없는, 익숙하거나 상투적으로 알고 있는 사물이나 사건의 현실적인 면모를 보이지 않는, 그래서 무엇을 그렸는지, 그 구체적 대상을 알아볼 수 없는 그리기다. 작품이라는 사물로서 사유와 본질, 자연과 정신이라는 두 개의 측면을 드러낼 뿐이다. 그런 면에서 ‘내재성의 구도’라는 말을 활용해본 것이다. 그렇다고 내재성을 작품 속에 있는, 흔히 추상화의 근저로 초월적 정신 운운하는 ‘선재 하는 초월적인’ 어떤 것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오해에 지나지 않는다. 도리어 초월성의 부정이다. 현행적이라는 말로 가능한, 지금 있는 그 자체로 스스로 일어나는 일, 오로지 그 자체에만 속하며, 무한의 운동들로 주파되는 것으로 ‘내재성의 구도’를 말한다.
화면을 장악하는 붓질과 그 붓질이 만드는 재질감과 색상과 운동, 이런 요소들이 구성하는 ‘구성의 내면성’이 그동안의 작업이었다면, 지금은 이런 선과 면, 붓질의 흔적이 줄어들고, 없어지는 흔적 그 자체, 흔적의 시간적 선행으로 이미 드러난 방법과 질료를 자신의 시간적 퇴적 위에 다시 긋기, 지우기, 문지르기로 지워가면서 다시 흔적으로서 선과 스크래치와 박락으로 드러난다. 손바닥에 만져질 듯한 재질감이 남기는 웅얼거림, 흐림, 어떤 재현조차 뭉개버리는, 단호하고 밀도 있는 화면은 그렇게 생성되는 것이다. 우리와 조우할 뿐이다. 서로 밀고 당기며, 서로 맞아떨어지지 않는 조각들이 전체를 이룬다. 선, 색, 면, 붓질, 흔적, 연상들이 서로 공명한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은 일관성을 띠며 전체를 이루는 데 이를 ‘내재성의 구도’, 서로 다르지만 상호 공명하며 보완하는 다수의 양상이 드러나게 하는 장소로 바뀌었다. 평면성이 강화된 것도 이런 변화 중의 하나다.
행위의 축적인 바탕의 거친 드러남, 인위를 거부하면서 인위이자 인위가 아닌 것, 있으면서 없는, 형상의 욕망이면서 욕망의 재현을 거부하는, 형상에의 욕구가 최대한 지워지는 것으로서 화면, 혹은 자신을 탈거하는 장소다. 어떤 것도 아닌 것으로 있는, 부재 하는 것의 존재감, 사실 그게 그의 장소(화면)에서 목격할 수 있는 전부다.

▲ 신성호, Trace2104
86 x 122cm, Mineral Pigment on Canvas

▲ 신성호, Trace2106
122 x 158cm, Mineral Pigment on Canvas

▲ 신성호, Trace2107
86 x 122cm, Mineral Pigment on Canvas

▲ 신성호, Trace2108
91 x 120cm, Mineral Pigment on Canvas
그래도 어딘가 충분하지 못하다. 이를테면 구상화가 입체를 평면에 옮겨놓는 것이라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 대상을 대상 그대로 결코 옮길 수 없다는 전제 아래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그림은 처음부터 대상의 재현 혹은 표상일 수 없다. 그러면 그림을 통해서 구체적인 대상을 인지하거나 이해하거나 확인하려는 우리의 재현적 그림 보기 자체가 잘못되었거나 오해로부터 시작된 셈이다. 그림은 결코 대상의 재현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입체를 평면으로 번안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며, 그림을 통해 입체적인 대상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을 불러내는 일이다. 그림을 그리거나 보는 일은 처음부터 대상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라 다른 일, 대상과 다른 혹은 통상적으로 대상으로부터 얻어지는 사물이 아니라 다른 측면, 기존의 것을 거부하는, 단절하는, 부정하는 것으로 만나는 지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언 듯 이해하듯 구상 회화에서조차 대상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다른 측면을 열어 보이는 것이라면 재현대상이 없는 추상화의 경우는 이런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 대상을 확인하려는 부담이 없는 대신 무언가 창조해야 하고 읽어내야 하고 이해하려 해야 하고, 부재한 것에서 무언가를 사유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건들의 공간이자 현행성의 사유이며 사물이다.
신성호의 작업은 이미지의 사유, 개념이 아닌 이미지로 사유하는 일이다. 이미지야말로 사건의 현장이라면 시각적 이미지를 만드는 작업은 사유의 현장 그 자체이다. 작업이 불러일으키는 현재와의 관계, “새로움, 흥미로움은 현행적이다. 현재의 우리들 그대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되어가는 그 무엇, 되어가는 도중의 무엇, 즉 타인, 타인이 되어가는 생성으로서의 우리”3)를 확인하려는 현행성의 노정이다. 지금 그대로의 우리가 아니라, 멈추어버린 우리의 존재로서 현재가 아니라 현행적으로 다가오는 과정, 혹은 존재들의 새로운 사건들을 세우는 일이다.
3)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이정임. 윤정임 옮김, 『철학이란 무엇인가』 현대미학사, 2016. p.64
다수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하나의 사물로서 추상화라는 일반적인 이해 정도이지만 신성호의 작업 역시 이런 범주나 이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만큼 추상화의 전형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전형성은 때로 느슨해지거나 타성적인 감상과 창작의 위험을 초래한다. 무한을 잃지 않으면서 일관성을 부여하는 일이 철학의 문제라면, 아무것도 없는, 주어진 대상도 전제된 형상도 없는 빈 캔버스, 무한 공간에서 그리기라는 행위와 질료가 이루는 일관성으로서 추상화의 문제란 ‘이미지 사유’ 그 자체의 생성이자 긴장이다. 다른 말로 그리기로서 철학 하기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유이면서 평범한 일상의 감정들과 지각 작용을 뛰어넘는 감동을 자아내는 독창적이고 유일한 이미지 생성이 작가와 감상자 앞에서 긴장하게 하는 것이다.
추상화를 두고 감각적 최전방이니 개념적인 작업이니 하는 양가적 인상은 가능하지만, 그것은 감동과 지각의 힘으로서 미학적 형상일 뿐이다. 그러나 그의 작업이 던지는 사유의 지점을 그저 감각적 지각이거나 방법으로 접근할 일은 아니다. 한 사람의 정신적 궤적으로 사유하는 면모를 함께 읽으려는 의지가 더 중요하다. 생성은 이질적 두 지점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생성의 이미지, 그게 이미지 사유이며 내재성의 구도이자 신성호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 신성호, Trace2109
117 x 177cm, Mineral Pigment on Canvas

▲ 신성호, Trace2110
122 x 122cm, Mineral Pigment on Canvas

▲ 신성호, Trace2111
98 x 98cm, Mineral Pigment on Canvas
작가노트 | 내재된 생명력의 외현 | 현실의 물질적 대상을 재현하지 않는 나의 그리기는 반복되는 붓질과 지움을 통해 생성의 세계와 다양한 생명의 양태(樣態)를 가시화 하고자 하는 것이다. 생동하는 붓질의 제스춰와 화면의 긴장을 통해 여러 생명체에 내재된 기운과 호흡, 소리, 생명에의 의지를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한 것은 드러나는 시각적 체험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 것의 그리기와 다르지 않다 여겨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