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춘연展 』
Hwang Chunyeon Solo Exhibition :: Painting

▲ 황춘연
전시작가 ▶ 황춘연(Hwang Chunyeon)
전시일정 ▶ 2020. 07. 17 ~ 2020. 07. 23
초대일시 ▶ 2020. 07. 17 PM 6:00
관람시간 ▶ Open 10:30 ~ Close 18:30(일요일 예약관람)
∽ ∥ ∽
미광화랑(MIKWANG GALLERY)
부산시 수영구 광남로 172번길2
T. 051-758-2247
www.mkart.net
● 나는 나를 훔쳐본다!
★김영준(부산현대미술관 큐레이터)
그냥 보면 꽃그림이다. 그런데 들과 산, 사람이 있는 풍경이다. 아름다운 꽃들은 마치 화면 밖으로 넘쳐 나올 만큼 가까이 있다. 꽃들은 화면을 좁게 만든다. 무한한 풍경을 우리 눈에 다 넣을 수 없는 바로크적인 공간이다. 그런데 바로크(Baroque)의 것이 극적인 효과를 불러내려 했다면 오히려 이 그림들은 야수파(Fauvisme)의 표면 같다.
바로크는 사건의 절정을 순간포착 하는 데 몰두했다. 따라서 사건 현장에서도 가장 중요한 단서만을 시각적으로 포획했다. 화면 밖의 넓은 공간은 관찰자의 상상에 맡겨진 암시적인 사건의 주변부들이다. 작가 황춘연은 바로크의 사건을 풍경으로 대체시켰다. 그리고 어떤 사건인지 관찰하고 분석해야하는 시각을 들판에 핀 꽃과 나무의 너그러운 감상으로 돌려놓았다. 그런데 들판에 핀 꽃과 나무들은 그저 전원(田園) 회화나 목가적인 풍경을 만든다든가, 그래서 감상주의의 수동적 시각으로 내몰지 않는다. 야수파 회화에 비유했던 것처럼 강렬한 색채대비는 시각초점을 분주하게 한다. 색채만의 효과는 아니다. 특이할 것 없어 보이는 풍경화의 구도인데도 야릇한 공간과 시각으로 유도한다. 좀 가혹하게 얘기 하면 강요한다고 하고 싶다.
시각의 강요는 일종의 은유(metaphor)이다. 이야기를 풀자면 고정된 관점(觀點)을 말하는데, 흔히 인용하는 것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원근법(perspective)이다. 원근법은 15세기 경 이탈리아 건축가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에 의해 창안되었다. 공간에 한 점을 통과하는 무수한 직선들을 가정하고 고정된 시점에서 투시된 선을 연결하여 그림을 그리는 도법이다. 이렇게 하면 사물이나 대상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그릴 수 있다고 믿었던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사실 원근법은 엄밀히 말해 투시도법(透視圖法)이라 해야 한다. 아무튼 원근법의 발명은 회화의 도법은 물론이고 근대적 시각의 중심이 되었다. 곧게 뻗은 철로의 두 선은 실제로 평행을 이루지만 우리 눈에는 반드시 한 점에서 만나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점이 원근법적 시각의 핵심인 소실점(vanishing point)이다. 소실점의 발견과 원근법의 발명을 통해 청각이 중심이었던 사회는 그것이 시각으로 옮겨가는 시각장(視覺場)의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런데 소위 원근법으로 말미암은 시각중심사회는 화가가 연출한 화면 시점에 고착된다. 다시 말해 이 원근법의 원리인 유클리드 기하학적(Euclidian geometry) 시점은 고정된 시점이라 화가가 관찰하고 그려낸 눈 위치를 관찰자도 벗어날 수 없다. 관점주의(원근법주의, perspectivism)가 생겨났으며 시각의 강요는 여기에서 나온다.
사실 황춘연의 그림을 진부하게 어떤 유파나 장르, 또 화법과 시각원리로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그림은 원근의 깊이감이 분명한데, 이것은 독특한 효과를 자아낸다. 근경의 꽃들은 나(관찰자)와 너무 밀착되어있어 이성적 관찰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반면 원경은 도저히 당도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묘사되어있다. 이 두 극단사이를 넓은 들판이 매개해 있는데, 이 중경에는 드문드문, 산수화에서나 나올법한 익명의 인물이나 말들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심도간의 차이는 강렬한 색채대비를 이뤄 마치 야수파 회화가 관념 산수의 구도를 갖고 있는 것 같은 독특한 일루전이 되었다.
시각을 압도하는 근경의 꽃과 나무들, 그 틈새를 들판과 언덕이 비집고 들어온다. 그 넓적한 곳에 한 여인이 있다. 때때로 그녀는 반려동물을 동반하지만 세상 유일한 존재처럼 배치된다. 얼핏 봤을 때 화면에서 ‘그녀’의 비중은 하찮은 것처럼 보였다. 조선시대 산수화에서 중경에 보였던 인물의 비중처럼 말이다. 그런데 산수화의 인물은 일종의 산수화라는 문맥 속에 관념처럼 기호화된 존재였다. 그러나 황춘연의 그림에서 ‘그녀’의 등장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산수화에서나 황춘연의 풍경 중경에서 발견되는 인물들은 모두 익명화 되어 있다. 하지만 실로 ‘그녀’는 분명 뚜렷한 관찰대상이다. ‘그녀’의 관찰은 관음(증)(觀淫症)적인 시각이 된다. 그러니까 나(관찰자)의 눈은 ‘그녀’를 훔쳐보는 구조에 배치된다. 근경의 꽃과 나무들이 나의 몸을 숨기는 은폐물이 되어 일방적으로 그녀의 신상을 살핀다.
이 독특한 시각구조와 대상의 배치는 무엇에 연유된 것일까? ‘관음’이라는 것은 사실 병리학적인 용어이다. 관찰자의 왜곡된 시각증상을 말한다. 감상자의 입장에서 ‘그녀’는 욕망의 대상처럼 배치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과연 ‘그녀’는 누구인가? 어떤 의미에서는 화가 자신의 환영일 수 있다. 화가는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자신을 투사시키고 대상화한다. 대상화와 내면화는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나를 본다는 것, 그것도 내가 어떤 상태로 있기를 원하는 것(욕망의 상태)으로 창조된 나를 훔쳐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화가 황춘연의 작업노트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나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은 우연의 연속이자, 시간을 담아내는 일이다.....(중략)......그것을 필연으로 삼아 삶의 가치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한편으로 나는 이런 우연을 두렵게 느끼기도 한다......(중략)......불안감 속에서 숨 가쁘게 목표를 따라가기 바빠 출발할 때의 우연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게 되어 심지어 내가 서있는 순간이 낯설게까지 느껴지는 때문일 것이다.’
그림 속 ‘그녀’의 의미는 우연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게 될까봐 이상적인 나로 대상화된 ’나‘, 이렇게 창조되어 이제는 낯설어진 ’나‘의 일루전이 아닐까? 그런 자신을 보는 것도 ‘그녀’에게 들킬까 몰래 훔쳐봐야하는, 수줍기 그지없는 나의 관찰그림이라면 어떨까? 그러니까 작가 황춘연의 그림은 그녀 스스로의 내면을 보기위한 관념풍경화라 불러도 될 것 같다.
필자는 화가가 자신의 노트에 ‘소중한 인연이나 아름다웠던 순간을 떠올리면 위안의 작은 미소를 가질 수 있게 되길’ 기원했던 것처럼, 눈앞에 맨드라미가 가득 피어 황홀한 풍경을 맘껏 느낄 수 있었다.
작가노트 | 아름다운 우연 | 나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은 우연의 연속이자, 시간을 담아내는 일이다. 한 폭의 그림을 시작하는 계기와 그려가는 과정, 그리고 완성의 순간들 모두가 우연의 연결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의 삶 자체도 모두가 우연한 것이며 그것을 필연적인 인연으로 삼아 삶의 가치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 나는 이런 우연을 두렵게 느끼기도 한다. 늘 시작은 순조로웠지만 반복의 일상과 비망록의 약속, 예기치 않은 작은 사건들은 과정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계획을 수시로 바뀌게 한다. 그리고 불안감 속에서 숨 가쁘게 목표를 뒤따라가기 바빠서 출발할 때의 우연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게 되고 심지어 내가 서있는 순간이 낯설게까지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상황이 되면 나는 마치 산책을 하는 마음으로 붓을 잡는다. 처음의 나 자신으로 회귀를 하듯 우연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기억하기 위해서...
나의 작품에는 특이한 재료의 퍼포먼스나 어떤 변조의 드라마는 없다.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보았거나 마주했을 법한 일상적인 풍경에 소중했던 우연의 순간이 담겨있고, 혹여 그림을 감상하는 이가 우연으로 인한 소중한 인연이나 아름다웠던 순간을 떠올리면 위안의 작은 미소를 가질 수 있길 기대하는 바램이 담겨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