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너의 의식이다 』
Group Exhibition :: Painting

▲ 나는 너의 의식이다
전시작가 ▶ 김선화, 김영순, 문지현, 임지현
전시일정 ▶ 2013. 09. 04 ~ 2013. 09. 14
초대일시 ▶ 2013. 09. 04 PM 6:00
관람시간 ▶ Open 11:00 ~ Close 19:00
∽ ∥ ∽
마린갤러리
부산시 해운대구 중2동 1510-1
T. 051-746-4757
● 소수자의 내밀함에 대해서
★강선학(평론가)
소비가 대중을 정의하는 시대다. 소비는 매혹적이고 끝 모를 유혹을 생산한다. 이 시대의 그림도 그렇다. 어디까지 갈 것인지 예견하기 힘든 변화와 함께 보는 이를 유혹하는 데 온통 정신이 빠져 있다. 어쩌면 미술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장식과 부화한 인생의 쾌를 위해, 혹은 목적을 위해 그 역할을 다해왔는지도, 그런 현상이, 그런 속성이, 그런 본질이 조금의 숨김도 없이 드러나고 있는 듯 보이는 것이 요즘 미술이다. 시대의 표층에 붙어 이 시대를 미끄러지듯 유영한는 그림들이 그렇고, 그런 현상에 어떤 회의도 주저함도 없이 매료당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시대의 이해에 뒤쳐진 듯 하는 언설들로 내친다. 예사로 듣고 보는 현상들이다. 전통적인 입체나 평면 뿐 아니라 영상이나, 설치조차도 이런 모양이라 예술이 사회적 거울이라는 근대 이후의 말이 무색하기만 하다. 이런 현상 자체가 한 시대의 사회적 거울이라고 한다면 그래도 나은 이해일까.

▲ 김선화, 뜨다
336x112cm, Acrylic on Canvas, 2013

▲ 김선화, 문 안과 문 밖
81x116.5cm, Acrylic on Canvas, 2012

▲ 김영순, 무제
91x65.1cm, Acrylic on Canvas, 2013

▲ 김영순, 무제
162x130.3cm, Acrylic on Canvas, 2013
'나는 너의 의식이다'전에 나온 작가들의 작업은 우리 시대의 우울한 초상이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우울함에 문제를 제기하고 진정성을 묻는 물음이 깔려 있다. 이 시대의 상품화된 우울에 대응할만한 감성적 영역을 환기시킨다. 개인의 은밀성, 개인이 가진 내밀함, 혹은 자신만의 어떤 것까지 까발려 상품화 하는 시대적 속성을 그저 후기자본주의의 현상이라고 넋 놓고 바라보기도 무엇한데 거기다 추임새까지 끼어든다. 개인을 몰아가는 우리 시대의 추세이다. 그것을 알고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갖기보다 모두에게 공개되어 버리는 것을 선택하는 그 심상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스마트폰을 이용한 카톡과 페이스북의 열풍은 소통불능의 세계가 그 원인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순식간에 공개되는 개인적 이야기는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은 욕망 때문일까. 그 욕망마저 학습된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해야만 하는 세태는 무엇일까.
이들 작업들이 보여주는 것은 때로 너무 개인적이고, 때로 너무 노골적이다. 때로 굳이 그렇게 이야기해야 하는지 하는 의문마저 든다. 게다가 이들 형상들은 자칫 순간적이고 가벼운 볼거리로서 개인적 심리 속으로 퇴영하는 듯한 흔적들도 없지 않다. 그것은 이들 형상이 서툴고, 완성도가 떨어지는 듯 하거나 너무 세련된 인상을 중요 장치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중 장치가 때로 그들이 기피하는 노골화된 정서적 노출과도 그리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흘려보낸다는 점에서 얼핏 큰 변별성을 찾지 못한다.
그러나 후기자본주의 사회니 시대적 심리니 운운하며 가벼운 터치로 마치 이 시대의 병리나 소외된 인간의 모습을 이해하는 양 과장되거나 하는 시늉들이 판치는 이 판에 이들 작업들은 사뭇 진지하고 진지하다 못해 소통불능에 이르고 있다. 일상적 공간을 벗어나는 것을 일상공간에서 찾아내거나, 세계와 하나 되는 범신론적 인식을 서슴없이 보여주거나, 자신 속의 식물적 이미지와 동물적 이미지를 거부하지 않는다. 현실적 상황 속에서 초현실적 과잉을 보아내거나 미분화된 자아의식을 통제하기보다 방치하듯 타자의 이입을 보아내는 등, 예사롭지 않은 심리적 정황들을 보여준다. 그곳에는 개인의 내밀한 심리적 현상을 더 이상 어쩌지 못하는 지경까지 밀고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의 내밀성 운운하는 작업들에 대해, 상품화된 개인들의 우울한 초상에 다른 초상으로 대응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쉽게 공유되는 정보들이 아니다. 읽혀지지만 쉽게 이해되는 문맥이 아니다. 어딘가 서툴고 낯선 것들 사이로 보는 이를 디밀듯 비집어 넣는다.
임지현, 문지현, 김선화, 김영순, 이들 작업은 딱히 무어라 말하기 곤란한 성격들을 가지고 있다. 서로 상통하는 듯 하지만 이질적이고 개별성이 강하다. 그렇다고 전혀 다른 성격의 이질성만 보이는 것도 아니다. 어떤 상처들, 내밀해서 드러나기 힘든, 그러나 그것이 기어이 표면으로 밀려올라 와서 피해가기 힘들게 만든다. 그 힘듦이란 과장하거나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그대로를 자신의 심리적 상태로 보아내게 한다는 데 있다. 이 시대의 인간으로 가질 수밖에 없거나 피할 수 없는 은밀함이다. 컴퓨터를 두들기거나 첨단 전화기 버튼을 눌러 온갖 것을 받아내지만 정작에 그곳에 자신이 없는, 타자들의 천국에서 문득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그런 순간들이다.

▲ 문지현, 던져진 것들
116.8x91.0cm, Acrylic on Canvas, 2013

▲ 임지현, 문
116.5x91cm, Oil on Canvas, 2013

▲ 임지현, 응시
73x83cm, Oil on Canvas, 2012
개인적 내밀함으로 시작되었지만 우리의 은밀함으로 드러나는 그런 곳이 그들 작업이다. 부정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난처한 상처들, 소외, 고독, 배제, 이 시대에 투사된 우울함이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상품으로서 상처를 치장한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이끌어가는 그런 치유의 상처들이다. 그런 면에서 이들의 작업은 부화한 시대에 자신의 존재감의 탐색이라는 면에서 타인과 소통하기 힘든 낯선 언어들이다. 나에게 다가오는 달콤한 언어에 익숙한 우리에게 그들의 언어는 난삽하다. 그리고 선뜻 수용하기에는 무언가 숨겨야 할 것을 다 들춰낸 듯해서 거북하다. 그리고 외국어처럼 낯설고 서툴다. 그들의 작업은 새겨서 읽고 해석하기를 요청한다. 그들의 작업을 소수자의 내밀함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