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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환상 속에서 - 김남진展 』
Kim Namjin Solo Exhibition :: Painting

▲ 김남진, 걸어서 오르는 사람
162.1x130.3cm, 캔버스 위에 나무판, 안료채색, 2010
전시작가 ▶ 김남진(Kim NamJin)
전시일정 ▶ 2011. 04. 15 ~ 2011. 05. 12
관람시간 ▶ Open 10:00 ~ Close 19:00
∽ ∥ ∽
수가화랑(SUKA ART SPACE)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1동 204-22
T. 051-552-4402
● 김남진의 “사회적 풍경”에 부쳐
★이성훈(경성대학교 철학과 및
대학원 문화기획행정이론학과 교수)
김남진은 성실한 사람이다. 특히 그의 성실함은 자신의 작품세계를 향할 때 더욱 견고해진다. 그의 자업장에서 나는 작은 산을 이루고 있는 나무 부스러기들을 눈으로 목도했고 손으로 만져봤고 발로 밟아봤다. 그는 이젤에다 붓으로 물감을 칠하는 이른바 회화작가가 아니다. 그는 커다란 나무판을 전기드릴로 긁어내고 파낸 다음에 그 위에 생긴 요철에다가 안료를 가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가 이런 힘든작업을 택한 개인적 이유도 있을 것이고 미술사적 이유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 드릴작업은 이중의 육체적 노동을 요한다. 정교하게 깎여 나오기를 거부하는 단단한 나무판은 편평한 캔버스에 그냥 붓질을 하는 작업에 비해 조형적 섬세함의 완성을 한층 더 어렵게 만들며, 작가가 지향하려는 가시적 조형세계에 도달하기가 휠씬 어렵고도 더디게 된다. (따라서 작가는 본인이 알고 있건 모르고 있건 간에 정교하고도 아름다운 조형세계를 가시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게 아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우리가 해볼수 있다. 다시 말해, 그는 관객에게 눈에 보이는 어떤 조형세계를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사유로 해석해낸 어떤 세계를 제시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다시, 정교한 조형세계의 가시화를 포기하면서까지 작가가 지향하고자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아니고, 가시적 특성이 촉매로 작용해서 그에 의해 해석된 어떤 정신적 세계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김남진이 자신의 작품에다 “사회적 풍경”이라고 하는 제목을 부친 이유가 아닐까.)

▲ 김남진, 무제, 193.9x130.3cm
Mixed Media on Canvas, 2010

▲ 김남진, 무제, 65.1x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0
이리하여, 그의 손에 쥐어진 전기드릴의 끝에서 여러 가지 형상이 정교하지 않게 모습을 드러낸다. 2003년의 신전 시리즈에서 2004년의 성운 시리즈, 2005년의 원시림, 2006년 마천루 시리즈와 2006부산비엔날레에 전시된 정치적 풍경, 그리고 이번 초대전에 전시되는 사회적 풍경에 이르기까지 김남진은 지치지도 않고 마치 이 실험의 가능성을 끝까지 파내기라고 하겠다는 듯이 작업실의 바닥을 나무부스러기로 쌓아가고 있다. 이번 초대전에 전시될 작품들은 소재로 보면 중국의 푸동지역, 크루즈, 마천루, 키즈랜드, 비행 등 크게 다섯 가지 유형으로 구성된다. 푸동의 하늘을 날고 있는 연들을 뒷짐 지거나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올려다보고 있는 중국 인민군의 뒷모습, 같은 푸동 지역의 솟아오른 고층빌딩과 그 배경을 이루고 있는 잿빛 하늘, 저 멀리 해변에 늘어선 마천루를 배경으로 바다를 가로질러 가거나 떠있는 다양한 모습의 거대 유람선들, 뾰족한 성당 꼭대기 같은 모습으로 클로즈업 된 마천루, 푸동과 한국 각지에 있는 놀이동산의 놀이기구들, 이 모두를 작가는 “사회적 풍경”이라 부른다. 왜 이런 모습들이 사회적 풍경이라는 하나의 타이틀로 묶이는 것일까?
먼저 말하건대, 이건 그냥 풍경이 아니다. 풍경의 범주에 들 만한 것으로는 크루즈의 배경이 되는 마천루 사이에 문득문득 서있는 키 큰 나무밖에 없다. 그래서 김남진의 작품들은 아직도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여느 풍경화처럼 유치하지 않다. 그런데 유치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삶의 켜가 배어있지 않고 문제를 문제로 보지 못하는, 그런 의미에서 역사성이 발육부전의 상태로 굳어버린 상황을 말한다. 김남진의 그림은 그 투박한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것 때문에 유치한 풍경화의 수준을 가볍게 뛰어넘을뿐더러, 그림 안에 인간의 모습이 전혀 등장하지 않거나 등장하더라도 얼굴이 있는 전면이 아니라 얼굴을 볼 수 없는 뒷모습만 나타나고 있다는 그 놀랄 만한 인간의 부재로 인해서 우리가 의례 풍경애서 받아들이곤 하는 천편일률적인 첫인상과 기대심리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대개의 경우가 그렇듯이 첫인상은 정확하다는 정확하지 않은 확신만 불러낼 뿐 정작 인식에까지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김남진의 그림은 첫인상에 쉽게 걸려들 만한 만만한 그림이 아닌 것이다. 그의 작품은 만만치 않은 분석과 독해를 요한다......중략
김남진의 사회적 풍경은 바로 이러한 인간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시각적 부정이고, 그림을 달리 봐야 한다는 강한 권유다. 우리는 그의 그림들에서 눈에 드러나고 있는 구체적 형상들에 주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의 그림들 모두에 지배적으로 깔려있는 어떤 사회적 분위기와 기운에 주목해야 한다. 인간이 있긴 있되 그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놀이기구가 돌아가고 있으되 그걸 타고 놀아야 할 아이들은 종적을 감춰버린 화면의 정적 같은 분위기는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을 그렇게 존재하게 만든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매커니즘에 대한 거의 불가능한 묘사로 이어진다. 마천루가 눈앞에 펼쳐져 있지만 마치 빅브라더가 세상을 통제하고 감시할 때 있을 법한 종탑이나 사령탑 같은 꼭대기만 클로즈업되고 있다는 것은, 그리고 유한계급들의 화려한 일상이 펼쳐져야 할 크루즈 역시 인간의 체취와 흔적이 죄다 중심의 발로가 아니라 그러한 음산한 사회적 풍경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어떤 지각될 수 없는 것을 드러내려고 하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분투노력이다. 김남진의 사회적 풍경은 그의 화면을 채우고 있는 가시적 형상들 속에 그려져 있는 게 아니라 그 형상들 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 하늘에 떠있는 연/놀이기구/유람선/마천루와 인간 사이의 필연적으로 추상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려질 수 없는 관계, 강성학이 이태호의 억새그림을 두고 부재 아닌 부재라 불렀던 그 사회적 관계 속에서 암시적으로만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알튀세가 레오나르도 크레모니니를 두고 추상화가 아니라 추상의 화가라 불렀듯이, 김남진은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그런 점에서 그리기가 불가능한 사회적 관계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추상의 화가다.(이번 전시회의 김남진에 국한시킨 것은, 내가 두 번째로 그의 작업 모습을 보러갔을 때 그가 다음 전시를 위해 작업하는 것이라며 보여준 것이 인간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바로 지적하지 않았지만, 나는 인간의 얼굴로 되돌아가는 것은 일종의 예술적 퇴행이라 생각한다. 하긴 우리 모두 부단히 이데올로기를 경계하지만 항상 성공을 거두는 것은 아니다.)

▲ 김남진, 걸어서 오르는 사람, 162.1x130.3cm
캔버스 위에 나무판, 안료채색, 2010
필경 이 추상적 관계는 사회적 관계이고 더 깊이 말하자면, 어느 누구에게도 호출되지 않고 익명으로 남고 싶어 하는, 그러나 우리 모두를 보이지 않는 중에 통제하고 조종하고 있는 사회적 매커니즘이다. 때로 어떤 그림은 이것을 드러내 보여준다. 잘 팔리는 그림들 중 소수가 좋은 그림이면, 인간들 간의 추상적인 사회적 관계를 보여주는 그림들은 극소수일망정 모두가 좋은 그림이다. 나는 이태호의 억새그림과 마찬가지로 김남진의 이번 “사회적 풍경”을 이 반열에 올려놓고 싶다는 강렬한 이론적 욕망을 느낀다. 작가가 가지고 있는 자연발생적 철학을 거스르며 어떤(좋은)예술이 출현하는 것은 예술의 역사에서 흔하지 않게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이를테면 의미의 비틀림이라 부를 만한 것 때문에 작가의 인간됨됨이와 작품의 위대함 사이에 간극이 생겨나는 것이다. 나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환상곡 C단조를 들을 떄마다 이러한 의미의 비틀림을, 예술가의 자연발생적 철학에 대한 의미의 변증법의 역습을 확인하곤 한다. 마찬가지로 관객들도 김남진의 이번 전시작품을 눈에 드러나는 가시적 형상에 어긋나게 읽어야 한다. 그들 역시 이를테면 대위법적 독해를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2007년 이성훈 교수 “김남진의 사회적 풍경에 부쳐” 논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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